”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먼 곳에서 북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로 하여금 서둘러 여행을 떠나게 만든 유일한 진짜 이유처럼 생각된다. “

– 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중에서

처음엔 어디가 숲이고 어디가 길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깊은 숲으로 들어섰으니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앞을 더듬거리며 길을 찾아야 했다.

2003년 10살의 나이에 소아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큰아이는 오랜 입원생활과 퇴원 후에도 계속되는 치료를 위해 사실상 초등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항암치료로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져 언제 어떤 경로로 병균과 바이러스에 감염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아이의 외부활동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겨우 학교의 최소 출석요건을 맞추기에 급급했다.

무척 명랑하고 밝았던 아이는 친구들과의 단절로 사회성이 급격히 저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수업을 따라갈 수 없어 성적도 많이 떨어지면서 점점 웃음을 잃고 자신감까지 오간데 없어져 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진단 결과를 받아 들고부터 6년간 – 아이는 아이대로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아빠인 나는 나대로 아이의 생존을 위해 나의 길을 찾아야 하는 – 저마다의 격변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2009년 늦가을 어느 날 내가 제주도로 모든 것을 정리해서 떠나야겠다고 아이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무작정 제주도로 이사를 가야겠다고, 뭘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에 대한 대책이나 계획도 없다고, 다만 아이를 살리는 길은 그것밖에 없다고 변명도 아닌 아이의 입장에서는 막무가내의 선전포고일 수밖에 없는 결정을 해버렸다.

아이가 16살이 되던 그해 봄, 엄마로부터 떠나와 먼 등하굣길을 마다하지 않은 채 아빠랑 살게 되어 기뻐했는데, 느닷없는 아빠의 제주도 이사소식은 부모의 이혼에 이은 또 다른 청천벽력이었다. 더구나 서울집 근처 걸어 다닐만한 곳에 위치한 역사가 오래된 유서 깊은 고등학교로 입학 배정을 받아 놓은 터에 제주도로 내려가는 것이 아이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는다고 강짜를 부리며 일방적인 이야기를 통지처럼 날렸다.

나는 아이와 함께 가고 싶지만 만약 아이가 원치 않으면 서울의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녀도 좋다고, 아이에게 설명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게 했다.

제주도로 이사를 가게 되면 제주시나 서귀포시내가 아니라 인적조차 뜸한 제주도 서남쪽 최남단 모슬포 쪽으로 이사를 갈 거라고, 그리고 그 동네엔 고등학교가 하나 있지만 대학입학률이 제주도에서 거의 최하위 수준이라고 미리 알아본 정보도 알려 주었다. 물론 제주시내의 대학진학률이 좋다는 학교로 입학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지만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아이의 등하교를 위해 픽업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아이에게도 버스로 1시간이 넘는 통학은 당시 건강상태로는 무리일 거라고 함께 귀띔해 주었다.

10년 만에 아빠와 함께 살기 위해 엄마로부터 떨어져 나와 아빠에게 온 아이에게, 집 앞 서울 명문고등학교 배정을 받아두고 대학진학조차 불분명한 제주도 모슬포란 외딴곳으로 이사를 갈지 말지를 스스로의 의견을 존중한다면서 결정하라고 하는 아빠의 무심함과 무책임함에 아이는 그저 눈물만 글썽거렸다.

아빠를 따라가는 것 말고 무슨 다른 선택권이 있을 수 있냐며 체념하며 말없이 따라주었던 아이 모습이, 12월 추운 겨울날 밤 차에 짐을 한가득 싣고 전라남도 고흥의 녹동항으로 차를 달려 다음날 아침 제주도행 페리선에 오르던 기억과 함께 지금도 선명하다.

아이의 표정으로 아이의 생각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충분히 짐작되는 아이의 생각과는 달리 아이를 살릴 유일한 방법은 내 안의 목소리를 따라 내 모든 것을 전부 던져보는 것 이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에게 보이는, 그래서 가야 한다고 여겨지는 유일한 길이었다.

왜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나에게 생기는 것인지, 도무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혼돈상태에서의 선택과 결정들이 요구되었지만, 그런 정상적으로 보이는 판단들은 아이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부모의 본능 앞에 무기력했다.

나에겐 내 안의 목소리가 하루키의 ‘먼 북소리’와 같았다.

***

Quote 1. 루소의 걷기

” 루소가 걸을 기회를 놓치는 법은 없었다. ” 그 정도로 사색하고 그 정도로 존재하고 그 정도로 경험하고 그 정도로 나다워지는 때는 혼자서 걸어서 여행할 때밖에 없었던 것 같다. 두 발로 걷는 일은 내 머리에 활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할까, 몸이 움직여야 마음도 움직인다고 할까. 시골 풍경, 계속 이어지는 기분 좋은 전망, 신선한 공기, 왕성한 식욕, 걷는 덕에 좋아지는 건강, 선술집의 허물없는 분위기, 내 예속된 상태와 열악한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것들의 부재. 바로 이런 모든 것이 내 영혼을 속박에서 풀어주고, 사유에 더 많은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나를 존재들의 광활한 바다에 빠지게 해 준다. 그 덕분에 나는 그 존재들을 아무 불편함이나 두려움 없이 마음껏 결합하고 선택하고 이용할 수 있다. “

Quote 2. 워즈워드의 걷기

” 내가 그때껏 본 그 어느 아침보다 찬란한 아침이 밝았소

앞에서는 멀리 바다가 환하게 웃으며 펼쳐졌고

가까이에서는 그 모든 묵직한 산들이 뭉게구름처럼 가볍게 빛나고 있었소

[…..] 내가 그 맹세를 한 것이 아니었소,

그 맹세가 어느새 내 것이 되어 있었을 뿐,

[…..] 오직 시를 위해 살겠다는 그 맹세와 함께 나는 계속 걸어갔소

그때 내가 느낀 그 고마운 행복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소.

이십 대 초반이었던 워즈워드는 시인으로 사는 삶의 모든 대안들에 하나하나 실패하는 체계적인 실험을 끝내고, 이제 자신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서 방랑과 사색을 선택한 듯하다.

내가 택할 길잡이가

그저 하늘을 떠도는 구름뿐이라고 한들

나는 길을 잃을 수가 없소. “

Quote 3. 엥겔스의 걷기

” 한편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파란 하늘 아래에서 활보할 권리를 위해 투쟁했는지는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읽어보기만 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책은 공장 노동자들의 육체에 기형과 질병을 초래할 정도로 처참한 생활환경과 노동환경을 고발한다. 요컨대 자연 속을 걷는 일은 중류층의 육체를 집과 사무실에 갇혀 있는 시대착오적 물건으로 변형시키는 환경, 노동자의 육체는 공장의 기계 부품으로 변형시키는 환경에 대한 거부반응이었다. “

– 인용들 from <걷기의 인문학 또는 걷기의 역사, 리베카 솔닛著>

걷는다는 것이 사람의 삶을 얼마나 바꿔 놓을 수 있는지 걷는 순간들을 한참 지나와 물끄러미 되돌아서서 보고 나서야 알게 된다. 우울함이 사라지며 건강해지고, 삶의 목표 내지 존재의 이유를 어느 순간에 명확하게 보여주기도 하고, 때론 새로운 문명의 도도한 흐름을 이끌며 터닝포인트를 만드는 분기점에 걷기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걷기의 역사는 한 사람의 역사인 동시에 때론 인류문명의 새로운 역사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라산둘레길 수악길구간의 다양한 숲길들. 숲이 길을 품고 있었다.

걷기와, 한 사람의 삶과, 그 사람들의 총합이 만들어내는 인류의 문명으로 연결되는 역사를 <제주를 걷는 21가지 방법 아홉번째길 > 한라산둘레길 수악길코스 위에서 다시 바라본다.

꼿꼿이 하늘로 뻗은 채 일직선으로 도열한 삼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면 걷게 되는 길들과 온갖 수종들이 어우러지면서 숲 속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길들을 품고서 미지의 어디에게론가로 인도하는듯한 길들이 중첩되어 있는 수악길구간은 그러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

2020년, 2009년 12월 제주도로 내려온 때로부터 다시 10년이 넘게 흘렀다.

백혈병 진단 후 꾸준한 치료로 재발되진 않았지만 언제 건강이 악화될지 한 치 앞을 몰라 늘 조마조마했던 아이에게 전혀 뜻밖의 일들이 그 이후 제주도에서 벌어졌다.

첫째, 아빠의 동분서주로 제주도로 내려온 이후 아이는 고등학교 생활 3년간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0~40분 거리의 학교를 혼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했다.

오랜 입원생활과 외부활동이 거의 없었던 관계로 바닥이었던 체력과 면역력이 그렇게 조금씩 단련되면서 건강을 회복해가는 것이 눈에 띄게 확연해졌다.

둘째, 아빠에게 이미 이야기는 들은 터였지만 고등학교 급우들은 애초에 대학진학에 목숨을 건 서울의 친구들과는 전혀 달랐다. 수업시간엔 그저 멍하니 앉아 시간을 때우기 일수였고, 하교 후 학원은커녕 야간자율학습도 대충대충이었다.

아이는 서울에서 본 친구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새로운 친구들을 보면서 이렇게 지내면 아무도 대학을 못 갈 텐데 하고 겁이 났다. 한국에선 대학을 못 가면 미래가 없는 곳인데 자기자신도 문제였지만 친구들이 걱정이 되었다.

서울에선 자신감을 뽐내던 건강하고 당찬 친구들에게 치여 자존감마저 바닥을 치던 아이가, 오히려 여기 제주도에선 주위 친구들을 걱정해서 이런저런 서울 친구들 이야기까지 들려주며 함께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며 오지랖을 부릴 지경이 되었다.

고2에 올라가자 담임선생님이 그런 아이에게 반장을 한번 맡아해보라고 했다. 아이는 조금씩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해갔으며 친구들과 밝게 어울려 지내는 모습이 잦아졌다.

셋째, 나는 아이에게 한 번도 공부하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내 기억속에 정말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건강하기만을 바라는 바람 하나뿐이었기에 공부나 대학진학 따위의 일들은 모두 호사가들만 누리는 사치였다.

제주도로 이사 오고 나서 친구들이 생기기까지 저녁이면 가로등 하나 켜지지 않는 아무 데도 갈 곳 없는 외딴 마을에 혼자 집에서 컴퓨터게임 이외에 아이에겐 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 고2로 올라가면서 친구들이 생기고 친구들과 함께 미래를 걱정하게 되면서 스스로 자신의 앞날을 꾸려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못할 나만의 이유를 명분으로 아이를 살려야 한다며 제주도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느라 정작 아이를 돌볼 겨늘이 없었기에, 아이는 스스로의 미래를 자기 자신을 책임지고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게 된 모양이다.

중3 땐 아빠를 따라 제주도행을 함께하는 것 이외엔 실질적인 대안이 없어 아빠와 함께 제주도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지만 고3이 되어선 생각이 달랐다. 아이에겐 고등학교 3년이면 아빠와의 생활기간으로 충분했다.

제주도는 공기도 맑고 건강해져서 좋았지만, 도시의 소음과 시끌벅쩍함이 아이에겐 그리워졌다. 태어나고 자라난 서울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대학입학이란 방법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혼자 교육방송으로 틈틈이 공부하며 스스로 입시준비를 해갔다. 그리고 2013년 2월,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다시 아이는 서울의 한 대학교의 입학식을 위해 올라갔다.

3년이란 세월은 아이에게 그런 시간이었다.

***

나무가 자라는 여러 가지 모습들이 숲길에 있다. 어떤 모양이어도 모두 한결같이 아름다울 뿐이다.

아이가 건강을 회복하게 될 거라곤, 아이가 자신감을 되찾을 거라곤, 아이가 대학을 가게 될 거라곤, 그런 기대들은 생각조차 아이에게 부담이 될까 조심스러워하던 일이었다.

제주도로 내려오던 그 녹동-제주간 여객선에서 뺨을 때리던 추운 바닷바람을 맞을 땐 백만분의 일도 꿈꾸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인간의 예측이란 게 얼마나 우매할 수 있는지 온 몸으로 깨달았다. 머리를 굴리고 온갖 이성적인 대비를 한다고 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생명의 불꽃이 시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로한 채 제주도로 내려왔어야 했는데, 가장 바라고 또 바라던 아이의 건강과 함께 아이 스스로의 홀로서기가 꿈처럼 이루어져 갔다.

그때서야 지옥을 헤매며 혼란스럽던 마음에 한줄기 빛이 평온함과 감사함으로 잦아들었다. 내 안의 목소리가 나를 어디로 어떻게 인도하며 안내해 왔는지 전율이 일었다.

이후부터 나는 내가 만들어낸 수많은 감정들의 막연한 불안과 공포의 덫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길 위에서 익혀 나갔다. 그리고 세상에서의 공부와 그위에 터 잡은 여러 경력으로 쌓인 합리적인 이성과 판단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덫에서도 조금씩 자유로워지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속 불안함과 공포라는 감정이 사라지고, 합리적인 생각과 이성의 판단 작용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숲이 품고 있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항상 옳다고 믿었던 나의 감정과, 나의 생각과, 나의 선택과 결정으로 오히려 나를 더욱 얽어매었던 운명의 그물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 내 안의 목소리를 따라 보다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걷는 길 위에서 내 안의 목소리를 따라 새롭게 살 수 있는 길들이 그제야 시선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 덧붙임. 아이와 나는 2016년 3월 첫 발병진단일로부터 13년이 지난때에 담당 의사선생님으로부터 관해(완치)판정과 함께 이제 더이상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부턴 아이의 건강은 전적으로 아이 스스로의 관리와 책임에 달렸다며 건강을 회복한 걸 축하해 주었다.

***

* 찾아가는 길 & 걷는 방법

서귀포시 1119번 산록도로로 자가 차량을 이용해 먼저 남원쓰레기매립장쪽으로 방향을 틀어 조금 들어가다 보면 사려니오름 입구로 향하는 길과 수악길이 이어지는 교차점이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계곡 숲길로 길을 잡으면 수악길코스가 시작된다. 수악길은 총 16.7km이지만 후반부는 돌길이 많으므로 출발점부터 시작해 이승악입구 주차장까지 약 6km 구간만 추천한다.

이승악입구 주차장앞 안내판. 여기가 반환점이다.

전체 길이가 길지 않고 편안한 숲길들로 이어져 있으니 이승악입구 주차장에서 반환점을 찍고 다시 수악길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왕복코스도 좋겠다. 물론 일행 중 한 명이 도착지점에 미리 차를 이동해 주차하고 일행과 합류하는 편도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신례목장길에서 바라본 한라산

혹은 이승악입구 주차장에서 일정을 마치거나 또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지 않고 1119번 산록도로까지 약 2.5km 구간을 더 걸어내려 가서 편도일정을 마무리하는 방법도 있다. 시멘트 포장길이라 더운 날씨에는 권하지 않지만, 일대 전체가 소 방목장으로 날씨가 맑은 날엔 한라산과 어울려 기막힌 풍광을 선물하며 도보여행자들을 힘겨운 줄 모르고 걷게 한다.

* 주위 추천 명소

– 서귀포 치유의 숲 (064-760-3067) : 서귀포시가 제2산록도로 시오름 근처에 수년간 공을 들여 숲 치유 전문가들과 함께 꼼꼼한 해외답사와 연구를 통해 수없이 기획안을 수정 보완하여 2016년에 탄생한 곳이다.

한라산 숲에서의 치유가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얼마나 탁월한지, 숲 테라피스트의 안내에 따라 진행되는 3시간 산림치유프로그램에 잊지 말고 미리 예약을 해서 참여해보자. 과연 우리나라 으뜸이다.

참가비는 1인 2만원이며, 프로그램은 오전/오후 2회에 걸쳐 진행되는데 시작 전후에 미리 점심으로 ‘차롱치유밥상(17,000원/1인)’도 꼭 신청해서 먹어보자. 서귀포 치유의 숲 인근 마을 주민이 직접 챙겨주신 정성스러운 제주 토속음식이 1년생 대나무로 엮어 만든 도시락(이걸 ‘차롱’이라 한다)에 정갈하고 이쁘게 그리고 또 푸짐하게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