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큰엉해안경승지

<제주를 걷는 21가지 방법> 중에서 여섯번째로 꼽은 길은 제주올레5코스 출발점인 남원포구에서 위미항까지 약 6km 구간이다.

남원포구에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만나게 되는 금호리조트 앞 큰엉해안경승지(큰엉은 큰 동굴이란 뜻)는 짧지만 이 구간의 아름다움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리조트의 산책로로 조성이 되어 사람의 손때를 탔음에도 불구하고 용암 절벽 위 낮은 보리수나무들과 온갖 수종들로 이루어진 나무터널길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작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산책길 나무들 사이사이에 절벽 위 뷰포인트로 빠져나가 깊고 푸른 바다를 만날 수 있는 샛길이 있으니 주저하지 말고 나가보자. 그 바다 사이로 가끔씩 바다거북이와 돌고래를 조우할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큰엉해안경승지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서 자세를 낮추면 한반도 모양의 하늘이 나타난다.

큰엉해안경승지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자세를 살짝 낮추면 가지치기를 해놓은 나무들 사이로 파란 하늘이 한반도 모양으로 나타나는데 무심코 지나게 되면서 놓치기 십상이다. 동행이 때마침 지나가고 있다면 마치 어둠의 공간에서 빛의 공간으로 희망을 찾아 나아가는듯한 멋진 인생사진 한 장을 찍어 선물할 절호의 찬스이다.

계속되는 남원 앞바다 제주올레 풍경들

큰엉을 지나도 동백군락지를 이루는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 내내 아름다운 길 위로 바다와 숲이 다채롭게 펼쳐지며 걷는 도보여행객이 피곤할 줄 모른다.

남원 앞바다의 제주올레 풍광만으로도 이미 몸과 마음이 행복해지는데 부족함이 없지만, 다시 마을길로 접어들고 나서도 돌담 사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구럼비나무, 귤나무, 엉겅퀴, 도깨비쇠고비, 동백나무의 잎과 꽃 그리고 열매들이 환한 모습으로 반겨준다. 제주올레5코스 전반부는 이렇게 자연과 마을의 아름다운 조화가 연이어지며 걷는 이의 눈과 코를 더욱 기쁘게 하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올레의 보물길이다.

위미리 동백나무군락지

제주도엔 동백나무군락지로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과 남원 신흥리와 위미리 세 곳이 명성이 자자한데, 매년 2~4월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동백꽃의 아름다움은 단연코 위미리 동백나무군락지가 으뜸이겠다. 동백 나뭇잎의 반질반질한 촉감과 짙푸른 색깔에 마음이 머물고 아름드리 키 큰 동백나무를 하늘로 쳐다보며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사이로 붉디붉은 동백꽃을 보자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빨간색은 서양 장미가 아니라 제주 동백이 아닐까 괜스레 으스대고 싶어 질 정도이다.

드립커피와 제주당근쥬스가 있는 위미리 마을길 카페 <와랑와랑>

동백나무군락지를 지나면서 곧 위미항으로 이어지면 이번 추천 구간이 마무리되지만 서둘러 이번 여정을 끝내기 전에 동백나무군락지가 시작되는 마을길 어귀 한편으로 눈에 들어오는 소박한 조그만 카페가 하나 있으니 한번 들러보자.

<와랑와랑> 이름도 특별한 카페다. 제주어로 불이 솟구치는 모양을 일컬어 ‘와랑와랑하다’고 하는데 육지사람들에겐 어서 오라고 들리기도 하고, 소리가 시끌벅적한 뜻 같게도 들린다.

그냥 길만 걷다 끝나기엔 너무나 짧고 아쉬운 코스이기에 잠시 머물며 걷기 사이에 쉼표를 두고 나의 위치를 가만히 짚어보기에 딱인 장소이다.

지나온 길과 앞으로 걸어야 할 길 사이에 있는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이 나의 목소리가 인도하는 그 길이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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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위대한 침묵 (Die Große Stille , 2005) >

” 완전한 침묵 속에서만 듣는 것이 시작되며, 언어가 사라질 때에만 보는 것이 시작된다. “

– 다큐영화 <위대한 침묵> 중에서

이 세상에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란 게 있을까. 이 세상에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이유란 게 가능할까.

목소리가 건네준 ‘존재의 목적과 이유’는 너무나도 광대하고 막연해서 상상으로도 감히 잡히지 않아 제주로 내려와 길을 걸으면서 질문을 다시 만들어 묻는다.

인간이 아무리 먼지와 같은 존재이지만 가끔씩 그 먼지 하나에도 진리가 머문다는 말이 동시에 있는 걸 보면 어쩌면 나의 미천한 존재함에도 무언가 창조주의 의도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려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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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섯 가지 인간의 감각 가운데 유난히도 시각과 청각이 예민한 편이다.

세상에 눈부신 빛의 조화를 몽땅 기억하려는 듯 젊은 날 여행할 땐 언제나 차 창가로 자리를 잡고 앉길 고집하고, 생각의 구조가 그림이나 동영상으로 짜여 생각조차 말하게 될 땐 머릿속 그림창고를 열어 그 기억의 이미지들을 단어로 풀어서 설명할 때가 대부분이다. 또한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처럼 작은 소리에도 귀에 걸려 신경이 쓰이고, 때론 영화 <사토라레>의 인물처럼 다른 사람의 생각조차 들리는듯할 때가 종종 있다.

보고 싶지 않아도 혹시 중요한 걸 못 보게 될까 두려워 지쳐 쓰러질 때까지 두 눈을 부릅뜨는 날들이 많았고, 듣고 싶지 않아도 혹시 중요한 이야기를 놓치진 않을까 걱정되어 작은 소리조차 귀를 쫑긋 해서 듣느라 힘겨운 날들이 많다. 특히나 해외출장이나 여행길에 오를 때면 보고 듣는 것에 기운을 빼기 일수여서 그야말로 짧은 시간에도 넉다운이 되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나에게 도시에서 성장하고 도시에서 생활하던 일상은 지나치게 많은 시력과 청력의 소진을 요구했다. 몸을 캐리커처로 그린다면 생각이 많은 머리가 가분수처럼 크게 그려지고 눈과 귀는 기괴하리만치 부풀어 올라온 상태가 될게 분명했다. 비대한 눈과 귀는 언제나 바깥으로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향해 있었기에 쉼 없이 빙글빙글 도는 레이더 안테나처럼 주위를 더듬으며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부여해준 미션은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나의 감각들에 대한 사용지침서의 방향을 정반대로 바꿀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점점 강해져 왔다. 비단 오감각뿐만 아니라 생활 전체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질문의 폭을 좁혀 들어감과 동시에 바꿔야 할 나의 생활의 범위를 ‘전체’에서 매우 구체적인 ‘단위’로 쪼개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중 특히나 시각과 청각은 최우선 순위에 있었다.

나의 에너지 대부분을 소진시키던 시각과 청각의 방향 전환을 위해 보는 것을 멈춰야 했고 듣는 것을 차단해야 했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이러한 노력들을 무산시키는 일이 다반사였고, 제주도로 생활을 옮기고 나서야 조금씩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이 가능했다. 처음엔 노력보다는 환경 자체가 도시와 섬이 너무나도 달랐기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옳겠다.

제주도에선 가만히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있어도 보고 들리는 이미지와 소리가 달랐다. 제주의 바다와 산과 오름과 곶자왈을 걸을 때면 전혀 다른 것들을 보게 되었고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제주도의 자연 위 길을 걸으며 탐지활동을 벌이던 레이더망을 통해 접수되는 시각과 청각의 정보들이 확연히 달라지면서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감정들과 생각들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물질과 소유와 치장과 관계 만들기- 이 모두는 외부를 지향하며 바깥의 것으로 내 안의 허기짐을 메꾸어 달래려는 무의식적인 행동들이다 -에 부산했던 대도시 콘크리트로 단절된 환경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연으로 이어지고 열린 공간으로 삶의 거처를 옮기는 것이 나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한 여정의 첫 번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점점 알아가게 되었다.

소유하고 집착하는 물질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그 물질의 금단현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생활비의 공급을 전제로 물질의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나를 꽁꽁 묶어 두었던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고, 탐욕하고 갈망하는 황야의 이리 같은 몸을 이겨내기 위해 사랑과 결별하며 혼자여야 했다. 나의 감정과 생각을 만들어내는 보는 것- 시각의 대상 -과 듣는 것- 청각의 대상-을 완전히 교체해야 했다. 그 교체의 과정을 비움이라고 표현하면 적절할까. 비움의 시간을 통해 몸과 마음 깊숙이 오랫동안 쌓여있던 치명적인 독들이 서서히 빠지면서, 빈자리 사이로 솟아오르는 평화로움과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유혹하는 세상의 그림자 대신 내 안의 빛을 바라보는 눈을 회복하는 길, 밖의 소리에서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 귀를 되찾는 길, 바깥으로 향하는 원심력의 모든 원인들을 차단하고 나를 흔드는 일체와의 결별, 그런 금촉(오감각의 접촉을 모두 끊는 것)의 노력들을 하나씩 그리고 때론 동시에 해나가는 일상이 제주도로 내려와 쉼 없이 계속되었다. 물질과 욕망에서 벗어나 몸을 바꾸고, 눈과 귀를 다시 여는 수행과 같은 시간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제주도는 그렇게 나에게, 몸과 마음의 재활을 위한 완벽한 고독을 제공하는 중세 유럽의 봉쇄수도원이 되어 주었다. 제주도의 하늘과 산과 바다는 나를 찾게 이끌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봉쇄수도원의 제단이었고, 제주도의 길들은 침묵의 발걸음으로 무뎌진 영혼을 벼르는 봉쇄수도원의 회랑이었다.

온전한 전환을 위한 완전한 고독. 바깥을 향해 두리번거리지 않는 것과 더불어 바깥으로부터 아무런 바람을 갖지 않고 철저히 안으로 거두는 것, 두 가지의 ‘무심(無心)’함이 이곳 스스로의 봉쇄수도원이었던 제주도에서 요구되었다. 봉쇄수도원에서의 시간과 함께 그 사이사이에 혹은 그 말미에 주어진 마음의 평화와 안식은 지금까지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고 또 다른 귀로 세상을 듣는 시작의 최소한의 전제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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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가는 길 : 서귀포버스터미널에서 201번 버스를 타고 남원포구 입구에서 내리면 된다. 올레5코스 출발점에는 제주올레안내소가 있다. 이곳에서 제주올레 패스포트를 하나 구입해서 올레코스 출발점과 중간점 그리고 도착점마다 스탬프를 하나씩 찍어보자. 앞으로 하나씩 패스포트의 빈 공간이 가득 채워지면 언젠가 425km 제주올레 완주증서와 완주메달을 기념으로 받게 된다.

* 주위 추천 명소

– 위미항 일송횟집 : 오전 10시경에 출발해 제주올레5코스 전반부가 위미항에서 마무리되면 점심식사 무렵이다. 위미항에 접어들자마자 올레길 위에 <일송횟집>이라는 식당이 있다. 점심식사 장소를 따로 꼽아두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회덮밥이나 물회를 점심식사로 추천한다. 깔끔함과 푸짐함은 여느 유명식당 못지않다.

– 서연의집 : 위미항에서 불과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올레길 진행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영화 <건축학개론>의 촬영지로 나온 곳이 <서연의집>이란 카페로 개방되어 있다. 워낙 유명해져 연일 20대부터 50대까지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 바람에 조금 소란스럽긴 하지만, 끝없이 반복 재생되는 전람회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을 이곳에서 듣는 맛은 그런 번잡스러움조차 무색하게 만든다. 30년 전으로 시간여행이 이곳의 공간과 노래로 가능해지는 경험 때문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