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시간이 주어져 21일 동안 제주도의 21가지 길을 모두 걷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처음에 어디서부터 걸으면 좋을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종종 지인들이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와 당일치기로 아니면 1박 2일로 급히 제주도에 왔는데 반나절 정도 걸어볼 수 있는 코스로 한 군데만 좀 알려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제주도에는 왜 온 것이며, 누구랑 함께 왔고, 숙소는 어디이며, 산이 좋은지 바다가 좋은지 숲이 좋은지 곶자왈이 좋은지 오름이 좋은지 일절 아무 말 없이 그냥 대뜸 최고로 좋은 길 한 곳만 추천해 달라고 하는, 참 대략 난감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그간 만족도 9할 이상의 타율을 올리고 있는 제주의 숨겨진 명소로 주저 없이 제주올레 10코스 중 산방연대~송악산둘레길 구간을 귀띔해준다. 어떤 이유로 누구와 함께 무엇을 바라고 왔건 대부분의 취향을 아우르면서 도시인들이라면 그 길 위에 들어서는 순간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는 특별한 자연을 품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꼭지에 소개한 안덕면 사계리의 단산(바굼지오름) 정상에서 바다 방향으로 한 시야에 들어오는 곳이 바로 이 구간이기도 하다.

제주올레 10코스 중에서, 마치 투구를 엎어 놓은 듯 제주도의 남서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산방산의 진면목을 바로 턱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산방연대에서부터 용머리해안을 거쳐 사계해변을 따라 송악산둘레길에 이르기까지 약 7km 정도의 구간을 첫 번째 길로 정했다. 이 구간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지질학의 명소들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아픔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 곳으로 그 면면들의 아름다움과 함께 깊이 팬 제주의 역사와 수많은 이야기들이 다발다발로 엮여 있다. 제주의 길중 지난 10년이 넘는 동안 족히 수십 번은 넘게 걸은 길중에서도 가장 많이 발걸음을 올렸던 이 길 위에서 나는 걸음의 숫자만큼이나 전에 없던 다른 생각들을 켜켜이 쌓아갔고 또 그만큼 추억을 가장 많이 그리고 선명하게 간직한 곳이기도 한 때문이다.

산방산 전경. 3월이면 주위가 유채꽃으로 가득하다. 
산방연대

왜구나 해적들의 침략을 알리기 위해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연락을 취했던, 제주도 해안선을 끼고도는 해안의 요지마다에 설치된 연대(煙臺)들 중 산방산 코앞에 위치한 산방연대는 그 장소와 산방산과의 조화로 아직도 그 위용이 출중하다. 산방산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바로 옆 산방연대에 올라 주상절리 절벽을 따라 정상까지 올려다보면 불과 395m 정도의 오름에도 불구하고 산방산은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과시하고 떡하니 서있다. 산방산도 제주도의 수많은 기생화산인 오름들과 같은 용암의 분출을 거쳐 형성된 곳인데, 점성이 매우 높은 조면암질 용암이 화구로부터 아주 천천히 흘러나와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이내 굳어버려 종모양의 독특한 용암돔을 형성한 것이 바로 지금의 산방산 모습인 까닭이다. 그곳 연대 마루에 잠시 걸터앉아 앞으로 걸어갈 길을 따라 서쪽의 이어진 사계 바다를 보고 있으니 두려움과 막막함의 첫걸음, 어느 참가자의 고함소리, 백만 불짜리 선물… 장소와 시간을 달리하는 이야기들이 흑백 영사기 돌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차르르 돌아가며 펼쳐진다.

산방연대에 오르면 왼쪽 산방산 앞 용머리해안에서 오른쪽 끝 저 멀리 송악산까지 걸어야 할 구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나. 두려움과 막막함의 첫걸음_퇴사

오래전 그 목소리를 처음 듣고 난 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만 그와 약속한 내용을 그냥 장난이나 잡생각으로 여길 수가 없었다. 혹여 나의 그런 방만함 때문에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나의 영혼은 지옥의 감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절망하고 괴로워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목소리와 약속한 나의 존재이유와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과정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막연한 가운데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그 해답을 알려줄 만한 사람들을 수소문하고 전국을 헤매 다녔다. 생의 근원을 향한 질문을 손에 들고 전국의 철학자와 목회자와 불가의 선지식에 이르기까지 미친 듯이 헤매며 찾아다닌 지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결론이 내려졌다. 아무도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려줄 수 없다는 것. 동시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로지 나 스스로만 구할 수 있다는 ‘느낌’이 왔다. 그 느낌은 일 년 전 느닷없이 조우한 그 목소리와는 다른 것으로 형태는 비슷하지만 강도가 몇십 배 작아진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의 목소리만큼 나의 몸과 영혼을 타고 전율처럼 전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미약하나마 그런 방향에서 그런 형태로서의 느낌이었기에 1년간의 방황 끝에 도달한 그 느낌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목소리는 그때부터 바라보는 ‘시선’에서 다시 나의 ‘느낌’으로 존재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또 한없이 막막했다. ‘나 스스로’… 그런데 어떻게? 다시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또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펼쳐본 앙드레 브르통의 소설 <나자 Nadja>에서 브르통이 나자에게 화를 내듯 내뱉은 말들은 그대로 화살이 되어 미처 도망갈 겨를도 없이 그만 내 영혼에 박혀 버렸다. 서울, 거대도시의 빽빽한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를 빠져나와 우르르 각자의 회사로 움츠린 채 걸어가는 사람들이 영혼 없는 좀비같이 느껴졌다.

” 저녁 7시가 가까워 올 때, 그녀는 지하철의 2등 칸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승객들 대부분은 하루 일을 끝마친 사람들이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 앉아서, 그들의 얼굴에서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걱정거리를 읽어 내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이제 막 내일의 일로, 단지 내일까지만 미뤄 두고 온 일을, 또 그날 저녁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을, 그 일 때문에 주름살이 펴지든 근심이 더 몰려오든 간에,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된다. 나자는 허공에 있는 무엇인가를 응시한다.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겠지요.” 나는 겉으로 나타내고 싶은 것 이상의 감동을 느꼈지만 이번에는 화를 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게다가 문제는 그런 데 있는 게 아니죠. 그 사람들이 다른 어떤 불행한 일들을 겪고 있든 아니든 간에, 노동을 감수하고 있는 한 그들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어요. 만약 그들에게 남아 있는 반항심이 최대한 강력하게 표출되지 못한다면,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그들이 일어설 수 있을까요? 게다가 그 순간에 당신은 그들을 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당신을 보지 않아요. 나는 모든 힘을 다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믿으라고 강요하는 그 노예화를 증오하겠어요. 나는 이런 노예화의 형벌을 받고서도 대부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지만, 그런 사람에게도 호의를 품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들도 강렬한 저항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공장의 가마에서, 몇 초간의 간격을 두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어디서나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들을 따라야 하는 모든 곳, 감옥의 독방이나 사령 집행자 앞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자유롭다고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감내하는 순교자는 자유를 창조할 수 없어요. 자유란, 끊임없이 사슬로부터 해방되려는 열망이고, 그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지요. 사슬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하려면, 지속적으로 가능하려면, 당신이 말한 선량한 사람들 중 대다수가 그렇듯이 우리 자신이 사슬에 짓눌려 있어서는 안 되지요. 그러나 또한 자유는, 아마 좀 더 인간적으로, 길든 짧든 인간이 사슬에서 해방되도록 해 주는 장엄한 행보의 연속이지요. 그들의 발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들이 그럴 시간이라도 있을까요? 그럴 수 있는 용기가 있나요?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했죠, 그래요, 전쟁에서 서로를 죽게 만드는 사람들처럼 선량하죠, 안 그런가요? 딱 잘라 말해서, 그들을 영웅이라고 한다면, 영웅은 대부분의 불행한 사람들과 몇몇 불쌍한 바보들이에요. 나로서는 이 발걸음이 전부라는 것을 고백하고 싶어요. 그들이 어디로 가는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질문이에요. “

2007년. 그날로부터 4년이 지나는 동안 매일 시간을 뭉개고 앉아 있다는 답답함에 두려워하며 여전히 해답을 찾아 헤매 다녔지만 그때는 ‘나 스스로’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기에 ‘나 스스로’에게서 찾지 않고 ‘나 스스로’를 또 어떻게 하는지를 알기 위해 방황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막연한 불안함만 커져 갔을 뿐 그 목소리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숙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그렇게 시간만 지나서는 안된다는 느낌은 점점 더 커져갔다. 뭔가를 찾아 해야 하는데, 그 뭔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며, 회사를 다니는 것으로 생계에 대한 대책을 삼는 것조차 여유요 사치스러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강박이 지나쳐 그런 느낌이 들 수 있었겠지만 그냥 무시해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여 오는 느낌이 암시하는 바는, 회사생활과 병행하는 것으로는 결코 그 목소리가 건네준 나의 과제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숙제를 하기 위해 나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 나의 하루를 그 당시 대부분 다 잡아먹고 있던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하게 반복적으로 나를 조여왔다.

유달리 온순했으며 착했던 나는 어릴 적 부모님이나 어른들의 안목으로 보아 반듯하고 착한 아이었다. 모범생이었기에 늘 칭찬을 들어왔고 나도 부모님과 주위분들의 그런 시선을 싫어하지 않았고 또한 마땅히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의 삶을 그들의 지침에 맞춰 살아가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동안 지켜만 봐오던 어른들의 시선과 기대는 그들의 안목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되는 직업과 일로 연결된 학교와 학과를 선택하는 것으로 다시 강권되었으며, 나는 별다른 뚜렷한 나의 생각과 바람이 없었기에 그저 그래야 하나 보다 하고 그들의 이끌림에 맞춰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나선 또 그들의 생각에 맞춰 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할 만한 직장 중 하나를 선택했고, 그 직장에서도 남눈에 띄기 좋은 일들을 선택하고 또 부여받아 일을 해 온 것이었다. 그렇게 십여 년을 넘게 타인의 시선에 맞춰 멋지고 행복할 거라는 직업을 가지고서 스스로도 자부하며 지내왔는데, 그런 직장을 그만두라니 – 사실 아무도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다. 다만 내가 느낌으로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 그만 다시 앞이 캄캄해졌다. 그때까지 살아온 날들마다 매 순간 중요한 결정을 할 땐 늘 부모님과 주위 어른들의 적극적인 권유와 간섭 내지 강권이 끊일 날이 없었는데, 이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결정과 행보를 나보고 직접 하라는 주문이 들어온 것이었다. ‘나 스스로’의 나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 시작은 지금까지 ‘나 스스로’ 결정하지 않은 것으로 선택되어 이끌어온 것으로부터의 정리, 우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렇게 내가 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첫 번째 미션이 내려진듯했다. 내가 스스로 숙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것, 그것들과의 결별과 정리가 가장 먼저 주어진 것이다.

그럼 당장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는지 그것부터가 암담했다. 그런데 왜 이런 속수무책의 느낌이 가장 먼저 주어진 것일까. 정말 느낌이 맞기는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느낌이 전하는 다음 행보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는 ‘갑’이었으며 언제나 나는 그의 선택과 지시에 따른 대로 움직여야 하는 ‘을’의 입장이었다. 아이의 목숨을 볼모로 잡혀둔 나는 나 혼자만의 상상일지 모르는 상상을 넘어 강박적인 상태에서의 불안감이 야기한 터무니없는 발상이라고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결코 배반할 수 없는 그 목소리가 전하는 메시지를 따라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어릴 적 나의 삶을 이끌어주던 부모님과 주위분들 대신하여 이젠 목소리를 대변하는 ‘느낌’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또다시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매번 반복되지만 혹시나 그 느낌을 무시하고서 대가로 아이의 건강과 생명이 잘못된다면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마지못해 느낌이 원하는 그 일을 저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인생의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가장 아름답게 열정을 다 바쳤던 짧지 않은 시간을 뒤로하고 무작정 새로운 길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느닷없이 내민 사직서에 주변에선 적잖은 반응들이 다시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도 아프고 잔뜩이나 대출로 부채도 많은 형편이었고 한편 회사에서는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맡아 승승장구 승진코스를 잘 밟아오던 내가 석연찮은 이유를 들먹이며 갑자기 사표를 내는 것 자체가 아무리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회사를 그만둔 것으로 어리둥절했던 회사뿐만 아니라 나도 왜 내가 사표를 그만두어야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나는 어쩔 수없이 사표를 냈어야만 했다. 느낌이 안내하는 곳이 미약하긴 했지만 바로 그것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할 뿐이지만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데 남들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나의 목소리가 전하는 느낌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회사에 핑계를 대는 것 자체가 더욱 이상한 일이었기에 그저 주위의 수군거림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사직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먹고 살길도 막막하고 회사를 그만둔 다음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나는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었던 회사를, 나의 생계와 세상에서의 존재 이유였던 최후의 보루를 그렇게 저버려야 했었다. 천 길 낭떠러지 앞으로 무작정 발을 내디뎌야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감행해야 했다. 앞뒤 좌우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마치 나는 자살특공대가 되어 적함으로 미사일을 달고 전투기를 내몰아야 했던 카미카제 특공대처럼 암흑으로 하나도 보이지 않아 죽음만이 있을 것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던 절벽 위에서 한걸음 허공으로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우선 아이부터 살리고 봐야 했다. 아니 솔직히 표현하면 나중에 변명할 거리가 없어 절망하며 울부짖을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 지금 그 죽음의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미래의 나를 살리기 위해 지금의 나를 죽이는 것, 이 표현 이외에는 가장 그 당시의 내 모습을 잘 설명하지 못할 것 같다.

00기업의 00팀장이라는 나의 직함은 한참 동안 보류되었던 사표가 수리되던 날부터 더 이상 나를 대변할 수 없었다. 내가 더 이상 명함으로 나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하게 되자 일순간 나와 세상사이의 관계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빨리 그렇게 많은 연락처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나는 과연 그동안 무엇이었길래 나의 사표와 동시에 이렇게 고립무원에 갇힌 듯 아무도 연락이 없던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겨우 학창 시절 오랜 동기들이나 간혹 안부를 묻는 연락을 해왔을 뿐 지난 10년이 넘는 사회생활은 불과 몇 개월 만에 나를 알카트래즈 감옥의 섬안으로 고립시켜 버렸다.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닌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들이 나와 함께 했던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어떻게 보았건 그들은 일말의 개인적인 호감도 있었겠으나 나라는 사람의 개성이 아닌 나라는 사람의 회사와 그 조직원으로서의 역할 담당자로서의 중요성이 절대적일 만큼 컸던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고 섭섭해할 일이 아니란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들도 어쩌겠는가. 그런 역할 담당자로서의 나와의 교류가 그들의 일이었기에 그 일에 충실한다는 의미에서 나를 만나왔던 것 자체가 그들의 역할이자 생활방식이었으며 그들의 생계수단이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속도로 사직 후의 관계 정리를 당하면서 그간 ‘나의 것’과 ‘나의 결정’으로 살아오지 않은 나의 삶을 철저히 후회하고 곱씹어 보게 되었다. 내 것인 줄 알았던 나의 직장은 내가 그 조직으로부터 떠나는 날부터 나와는 전혀 무관하게 철저히 남이 되어버렸다. 내 것이라면 조직 안에 있건 없건 나와 그 조직은 불과분의 관계였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언제든 그 조직의 대체 가능한 일부로 소용되었다는 것을 뼈아프게 되새겨야 했다. (회사생활은 무척 다이내믹했고 많은 경험과 새롭고 넓은 세상을 만나게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줄 알았더라면 왜 내가 나의 전부인 양 그곳에 나의 20대 후반과 30대의 대부분을 힘과 성을 다해 쏟아부었는지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나의 것이 아닌 곳에 나를 헌신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의 헛됨과 참담함을 이렇게 빠르게 확인하게 될 거라곤 정말이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철저히 혼자가 되었고 나는 넋이 빠진 채 아무런 방향성도 갖지 않고 내동댕이쳐졌다.

그 느낌을 따라 스스로 그렇게, 부모님과 주위의 말을 듣지 않고, 아무도 들을 수도 없고 알아챌 수도 없는 내 안의 그 설명할 수 없는 느낌만을 따라 나 홀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한 내 인생 두 번째 일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지시로 나를 살아가는 것에서 벗어 나온 두 번째였다. 그것을 나의 느낌이 경험하도록 인도한 것임을 긴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 ‘나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따른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갔으며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흩어져가는 듯했다.

사계리 해변에선 신발을 잠시 벗어두고 발을 담가보자. 

둘. 어느 참가자의 고함소리_말 못 할 사정

2015년 초여름 즈음이었을까. 그날도 으레 내가 진행하고 있는 제주 건강힐링 프로그램에 신청한 참가자들을 모시고 제주공항에서 곧바로 사계리 바닷길로 안내했다. 남태평양으로 열려있는 비움의 바다 위로 도시의 스트레스를 몽땅 던져 버리게 하고 답답한 속을 뻥 뚫어 드려야겠다는 의욕에 날씨가 예상보다 조금 더웠음에도 큰 바다가 주는 기쁨에 모두가 감동할 것이 분명했기에 예정대로 진행했다. 짧은 코스지만 형제섬이 저 앞에 펼쳐지는 사계리 해변을 따라 큰 호흡을 하면서 가슴을 활짝 펴라고 외치며 곧 있을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길을 잡아갈 때쯤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전에 없던 일이라 설마 우리 일행일까 했는데 참가자들이 빨리 뒤로 가보라며 손짓하기에 선두그룹을 식당으로 먼저 안내하고 바로 그쪽으로 뛰어갔다.

“네가 나를 죽게 하려고 작정을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이런 뙤약볕에 사람을 이렇게 오래 걷도록 할 수가 있느냐”며 반백의 참가자가 노발대발 화를 내신다. “나는 이러다가는 죽을 수 있으니 당장 참가비 환불해주고 공항으로 데려다줘”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신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연신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여 사과를 드리고 공항으로 가시더라도 식당이 바로 앞이니 점심 드시고 모셔다 드리겠다고 사정을 거듭 구했다. “점심 따위가 무슨 대수냐. 이런 날 사람을 걷게 해서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당신이 책임을 어떻게 질 거냐”며 막무가내였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저의 불찰이라고 거듭 용서를 구하면서 식당으로 간신히 모시고 들어가자 수백 명이 가득한 식당에서 다시 큰소리로 “오늘 내가 길을 걷다가 죽을뻔했다”라고 고함치셨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난감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다른 참가자들에겐 양해를 구하고 그분만 별도의 자리에 모시고 앉아 식사를 따로 차려 내놓고 드시라고 권했다. 처음에는 밥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며 다시 그늘 하나 없는 바닷가 해변 뙤약볕 아래 걷게 한 것을 원망하셨다. 그래도 또 죄송하다고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 식사를 조금이라도 하시면 공항으로 모셔다 드리겠다고 하자 간신히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면서 밥술을 뜨셨다.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모두 조금 땀이 나는 정도 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못 견딜만큼의 여름 뙤약볕은 아니었고 더 넓은 바다를 기분 좋게 산책하고 나서 바닷가에서 내놓은 해물전골의 푸짐한 식사를 앞에 두고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소리를 지르며 다른 사람들의 기분까지 망쳐 놓는 반백의 할머니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심지어 어떤 참가자는 저 사람만 참가자냐며 빨리 택시 불러서 공항으로 가시게 하고 예정대로 프로그램을 그냥 진행하라며 내편을 들어주는 분까지 있었지만, 한 사람의 참가자가 불만스러워 이렇게 큰소리로 그것도 프로그램 첫날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전체 분위기를 망쳐 버렸으니 이번 일정은 전례 없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아 갈 것이 눈앞에 선했다. 앞이 캄캄했고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몰라 할머니 앞에 앉아 식사만 챙겨드리면서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기만 했다. 완강히 거부하던 식사를 뜻밖에 거의 다 드시고 나자 그분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더욱 잦아들었다. 식사를 좀 더 권하자 됐다며 냉수를 더 달라고 하시더니 한 모금 마시고는 “내가 얼마나 식겁을 한 줄 자네는 모를 거야. 까딱하다가는 내가 길거리에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갈 뻔했어.”라고 하신다. 이미 목소리에 이전의 노기가 오간 데가 없다. 얼굴을 앞쪽으로 가까이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신다. “사실은 내가 몇 달 전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어. 위험한 수술이었는데 간신히 수술을 잘 마치고 몇 달 동안 조심스럽게 지냈지. 회복하느라 재활운동도 하고 그랬는데 이 프로그램이 치유와 회복에 도움이 된다길래 걱정이 되면서도 믿고 참가신청을 했는데 첫날 도착하자마자 바닷가로 뙤약볕 아래 쉬지도 않고 걷게 하니까 갑자기 식은땀이 나고 어지러우면서 덜컥 겁이 났다고. 이러다 쓰러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앞뒤 좌우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고. 우선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그런 상황으로 몰아붙인 자네에게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단 말이야. 그런데 이젠 좀 괜찮아졌어. 아침 일찍 공항으로 나서느라 밥도 못 챙겨 먹고 목도 말라서 내가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졌나 봐. 하지만 두 번 다시 이렇게 일정을 잡지는 마. 사람들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같이 말 못 할 사정으로 여기 온 사람들이 보나 마나 한 둘이 아닐 거야. 암수술 한 사람들도 몇몇 될 거야. 모두 조심조심 걱정 걱정하며 여기 왔는데 세심하게 배려를 하지 않으면 큰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알겠지?!” 조곤조곤 다짐을 받아내려는 듯 하지만 살짝은 미안해하시며 쑥스러운 듯 말을 건네시고 있었다.

사계리해변에서 바라본 형제섬

만약 조금 전 큰소리를 지를 때 이해가 되지 않는 그분의 언행에 자초지종을 들을 생각도 없이 나도 같이 무턱대고 잘못이 없다며 뭐가 문제냐고 따지고 들었다면 어쩔 뻔했는지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온몸에서 맥이 풀리며 기운이 쫙 빠지는 듯했다. 사람마다 얼마나 다양한 처지에서 제주도를 찾고 있는지 얼마나 수많은 사정 속에서 프로그램에 참가했는지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을 그때 깊이 깨달았다. 그분은 화가 나서 트집을 잡으려고 고함을 친 게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로 짓눌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살려달라는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 그게 나에겐 이유도 없는 거친 불평으로만 여겨졌을 뿐이었다. 만약 그 말의 의미를 모르고 그 말의 표현만 보고 무시했거나 아니면 같이 화를 내버리고 그분을 돌려보내드렸다면 얼마나 씻지 못할 후회스러운 일로 남을 것이며, 그로 인해 전체 일정 중 첫날에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얼마나 일파만파 악영향을 끼칠 번했을지를 생각하니 아직도 식은땀이 나고 한 숨이 나온다. 모든 일에 겉모양만 보고 반응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끝까지 감정을 차분히 하고 특히 고객의 불만과 불편은 무슨 이유에서라도 나의 부족함과 잘못이라는 것을 먼저 되새기고 상대방의 처지를 묻고 또 물어 깊은 속사정을 헤아려야 한다는 생각을 평생 가슴속에 새기게 되는 계기를 사계리 해변을 따라 이어진 길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백만 불짜리 풍광의 선물
송악산 둘레길

셋. 백만 불짜리 풍광 선물_pay it forward

사계리해변을 따라 계속 걷다가 마라도와 가파도가 보이는 제주도 남서쪽 끄트머리에 볼록하고 튀어나온 송악산둘레길에 접어들게 되면 왼편으로는 지나온 산방산과 사계리해변과 함께 멀리 한라산이 파란 하늘 구름 속으로 그림같이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광활한 바다가 180도 넘게 펼쳐지는 곳이 나타난다. 이름은 송악산이라 불리지만 용암의 분출로 깊고 둥근 분화구까지 갖춘 제주도 최남단의 기생화산(오름)을 끼고 너른 바다 절벽 위를 뺑 둘러 걷게 되는데, 이곳이 <제주를 걷는 21가지 방법> 전체 구간 중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라고 말하고 싶다. 짧은 거리의 송악산둘레길은 얼마나 더 이 길을 걸어야 혹여라도 지겨워질 수 있을까를 갈 때마다 떠오르게 하는 길이다.

언제였는지 정확한 연도와 계절이 기억에 없지만, 그때도 여느 때와 같이 참가자들을 모시고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장소에 도착해 한껏 제주도 자랑과 함께 이곳의 풍광을 백만 불짜리라며 모두 공짜로 선물해 드리겠다며 의기양양 크게 외쳤다. 모두들 카메라에 그 풍광을 담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몇몇 분들은 절벽 위 울타리에 턱을 고이고 망망대해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나마 말을 잊고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도시의 빽빽한 직선 공간에 익숙한 대부분의 참가객들에게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인간의 시야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곳임이 분명했다. 그곳에서 그렇게 한껏 풍광을 자랑하고 며칠이 지나 프로그램 전체 일정이 모두 종료되고 끝으로 참가자들의 소감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는데 한 분이 일어나 조용하고 묵직한 톤으로 이야기를 한마디 하고 싶다고 했다.

“저는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 열심히 일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젊어서 여러 번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만 다행히도 추진했던 사업이 때를 잘 만난 덕분에 앞으로 남은 여생 다 쓰고 죽지 못할 만큼의 부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살아 이제 가난을 면하고 돈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는데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를 문득 떠올려보니 마음이 착잡해지고 허망하기조차 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제인가부터 앞으로는 더 이상 돈을 버는 일에 힘을 쏟지 않고 제가 지금까지 번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은 곳에 잘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정에 첫날 강보식 대표가 송악산 둘레길에서 백만 불짜리 풍광이라고 하며 모든 분들께 선물해 드리겠다고 한 이야기를 듣는데, 전 세계 웬만한 곳을 다 여행해본 저로서도 과연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갑작스레 누군가로부터 100만 불이나 되는 선물을 받았는데 이렇게 비싼 선물을 그냥 받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는 동안 좋은 일에 써야 할 돈이 넘치도록 쌓여 있는데 그날 또 백만 불어치 선물을 받았기에 이 선물의 값어치만큼 나도 좋은 곳에 선물을 해서 돈 창고가 쌓이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약속을 하나 드립니다. 제가 받은 100만 불짜리 제주도 풍광 선물은 한국 원화로 환산하면 약 10억 원 정도의 금액입니다. 제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올해 중으로 그만큼의 액수를 반드시 좋은 곳에 기부하거나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머리가 어찔했다. 가슴이 뭉클하게 저며오며 코끝이 시큰해졌다. 마치 클래식 무대의 연주자가 연주를 마치고 마지막 여운을 길게 끌며 침묵 속에 감동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두듯이 참가자 모두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숨죽인 채로 있었다. 정적이 지나고 나자 진심을 담아 모두 뜨겁게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모두 같은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큰 소리로 외치며 자랑했던 제주도의 값지고도 아름다운 풍광을 액면 그대로 진심으로 받아 전혀 다른 형태의 나눔으로 만져지지 않는 선물이 흐르도록 한 어느 부자의 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살아오는 동안 늘 벌고 또 벌어 쌓고 또 쌓기만을 바라 온 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날 어쩌면 우리의 삶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돈이 어느 순간 전부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태어나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돈이 욕심과 부의 축적의 수단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한 감사의 선물이 되도록 흐르고 흐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 부자는 조용히 일깨워 주었다. 돈에게도 생각이 있다면 아마도 돈은 그런 부자에게로 들어가 그를 통해 세상에 따뜻함을 나누는 천사의 모습으로 세상을 여행하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돈에게도 전혀 다른 흐름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나는 이 길을 걸을 때마다 그 부자의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그날의 감동을 떠올리며 백만 불짜리 풍광을 또 선물하고 선물하면서.

* 산방산을 가는 방법은 제주시외버스터미널이나 서귀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2번 버스를 타거나, 모슬포 운진항 버스종점에서 752-1번 지역순환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752-1번 버스는 모슬포 운진항 종점에서 바닷길을 따라 송악산둘레길과 알뜨르 비행장을 거쳐 산방산을 지나니 개별 차편이 없는 분들은 버스 드라이브로도 좋겠다. 대정읍이나 안덕면 일대에서는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으니 대정안덕콜택시(064-794-0707/064-792-0082)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송악산둘레길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걸어야 좋다.

* 짧은 코스 : 산방연대부터 송악산둘레길까지 모두 걷기 힘들거나 시간이 허락지 않는 분들에게는 산방연대에 오른 다음 다시 차로 이동해 송악산둘레길만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송악산둘레길은 3km 남짓 거리로 한 바퀴를 도는 형태로 길이 이어져 있는데, 제주올레 진행방향(파란색화살표 방향)보다 시계반대방향(주황색화살표 방향)으로 걷는 게 훨씬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방법이다. 송악산둘레길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지 말고 송악산둘레길 출구 쪽 소나무 숲 앞에 있는 임시 소형 주차장에서 출발해서 송림 쪽으로 먼저 길을 잡아 마지막 나오는 곳이 사계리해안 방향의 원래 입구 쪽으로 걷는 것을 강력히 추천드린다. 걷는 피곤함이 덜할 뿐만 아니라 백만 불짜리 풍광을 송악산둘레길의 마지막에 다시 조우하는 기쁨이 압권이기 때문이다.

순서대로 세계지질공원 <용머리해안>, 1950년 250여명의 마을주민들이 묻혀진 <섯알오름 4.3학살터>, 일제시대 일본군의 중국 난징공습 출격지였던 <알뜨르비행장>

* 긴 코스 : 산방연대에서 출발해 (용머리해안을 들렀다) 사계해변을 지나고 송악산둘레길까지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시간과 체력이 된다면 내처 제주역사의 현장으로 구성된 다크투어리즘의 장소들로 이어지는 섯알오름 4.3 학살터와 알뜨르비행장 그리고 하모해수욕장에 이르는 전체 12km 구간을 계속 이어서 걸어보길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여유 있게 총 3~4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구비구비 다른 풍광들을 펼쳐내는 제주의 아름다움과 함께 역사의 아픔이 얽히고 설켜 있다.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면 모슬포항으로 이동해 포구의 맛집들에서 해산물도 맛보고 때가 맞으면 매월 뒷자리 1일과 6일에 서는 모슬포 오일장도 한번 방문해 보길 권한다. 언제나 시골장엔 활력이 넘치므로 삶이 우울해질 겨를이 없다. 끝으로 제주엔 물이 귀하고 온천 또한 거의 없는데 산방산 북서쪽에 자리 잡은 산방산 탄산온천에 가면 27~28도의 시원하면서도 따뜻한 탄산온천에서 여독을 푸는 맛이 색다르다.

* 이어지는 두 번째 코스는 3~4월 봄날 청보리축제로 유명한 제주올레 10-1코스 가파도 구간이다.